조선통금 · 웹소설 1화

조선통금

1화 사흘 전에 묻은 사람

사흘 전에 묻은 사람 이름으로 군포를 새로 매기라는 명령이 떨어져, 나는 붓을 멈췄다.

장만복. 운종가 뒤편에서 체를 만들어 팔던 어른이었다. 곡식을 거르는 둥근 대나무 체를 등에 한 짐씩 지고 다녔고, 허리를 펼 때마다 오른쪽 어깨부터 만지곤 했다. 사흘 전에는 이웃들과 함께 그 어른의 관을 멨다.

“이분 돌아가셨습니다.”

장부를 맡은 군관 배성탁은 내가 베껴 놓은 종이를 세고 있었다. 손가락에 침을 묻히고 한 장을 넘긴 뒤에야 대답이 왔다.

“그럼 부인에게 내라고 해.”

“전에 못 낸 군포가 남았다는 겁니까?”

“아니. 이번에 새로 매기는 몫이야.”

군포는 군역 대신 내는 천이었다. 나는 베끼던 장부를 펴 장만복 어른의 이름을 짚었다. 그 옆에는 아직 살아 있다고 적혀 있었다.

“돌아가신 분을 살아 있다고 두고 또 걷겠다는 겁니까? 이름부터 빼야 하지 않습니까.”

“장부 고치는 건 네 일이 아니야. 내려온 대로 베껴.”

배 군관은 내가 짚은 줄은 보지 않은 채 다음 종이를 넘겼다.

그러고는 내 옆으로 엽전 세 닢을 밀어 놓았다. 장부 다섯 장을 베낀 품삯이었다.

“다 끝내고 가. 순라 나가기 전에 군포 내라는 종이만 전하면 돼.”

나는 붓을 다시 들었다. 죽은 이의 이름 옆에 살아 있다고 옮겨 적는 동안에도 먹은 매끄럽게 나왔다. 틀린 글씨를 쓸 때는 붓끝이라도 갈라지면 좋으련만, 내가 쓰는 붓은 그런 일까지 가려 주지 않았다. 그 줄을 옮긴 뒤에는 납부 통지문에도 같은 이름을 썼다.

품삯은 받아서 허리춤에 넣었다.

·   ·   ·

장만복 어른의 집 대문 옆에는 팔지 못한 체들이 포개져 있었다.

큰 것 안에 작은 것을 넣어 두어, 멀리서 보면 둥근 테 하나뿐인 줄 알았다. 가까이 가니 그 안에 여섯 개가 더 있었다. 어른은 저걸 한꺼번에 등에 지고 다녔다. 새것을 하나 만들 때마다 허리가 조금씩 더 굽는다고 웃곤 했다.

“아주머니, 겸입니다.”

마당에서 어른의 아내 오덕임 아주머니가 나왔다. 울다 잠긴 목소리로 밥은 먹었느냐고 묻기에, 나는 대답 대신 손의 종이를 내려다보았다.

“관아에서 보냈습니다. 장 어른 이름으로 군포를 내라고…….”

아주머니는 내가 내민 종이를 받지 않았다.

“죽었다는 신고를 했는데도?”

나는 종이를 거두지도 못한 채 서 있었다. 아주머니는 관자놀이의 큰 점을 손등으로 문지르다가, 손에 묻은 먼지를 보고 앞치마에 닦았다. 마당 한구석에는 덜 마른 상복이 널려 있었다.

“죽었다는 신고를 어제 냈어. 처음 갔을 때는 종이가 다르다고 돌려보내더구나. 이번에는 저 양반 관 짠 사람까지 데려갔는데.”

“제가 알아보겠습니다.”

“누구한테?”

떠오르는 얼굴은 조금 전의 배 군관 하나였다. 아주머니가 나를 보며 기다렸다. 나는 종이 모서리에 묻은 먹을 엄지로 문질렀지만 이미 말라 지워지지 않았다.

“오늘 낮에 제가 베낀 장부에도 장 어른이 살아 있다고 적혀 있었습니다. 틀린 줄 알면서 그대로 옮겼습니다. 군포 내라는 이 종이까지요.”

“살아 있다고?”

“예. 잘못됐다고 말씀은 드렸는데…….”

아주머니가 종이를 가져가 펼쳤다. 한동안 말이 없어 마당의 젖은 옷에서 물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관 메고 갔을 때 네 어깨도 봤다. 빨갛게 눌렸더라.”

나는 고개를 들지 못했다.

“그 어깨로 살아 있다고 쓰러 갔니.”

시켰다는 말이 목구멍에 걸렸다. 그 말을 한다고 아주머니 손의 종이에 내 글씨가 없어지지는 않을 터였다.

“내일은 같이 가겠습니다. 제가 그 장부를 베꼈다고, 거기서 직접 말하겠습니다.”

“내일 순라 끝나면 자야 할 거 아니냐.”

“좀 늦게 자겠습니다.”

아주머니는 종이를 반듯하게 접어 품에 넣었다. 나를 용서한다는 말도, 다시는 오지 말라는 말도 하지 않았다. 대신 체 더미를 가리켰다.

“그럼 저거나 안으로 들여다오. 저녁에 비 오면 남은 것도 못 판다.”

나는 큰 체부터 들었다. 아주머니가 작은 것들을 포개 주며 대문 아래를 조심하라고 했다. 문지방 앞의 흙이 빗물에 패여 홈이 생겼는데, 어른이 메운다던 것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

마지막 체를 들이고 돌아서다가 문짝의 호랑이 그림을 보았다. 다른 집의 빛바랜 그림과 달리 먹빛이 선명했고, 아래에는 붉은 도장이 찍혀 있었다.

“이건 새로 붙이셨네요.”

“낮에 와서 바꿔 줬다. 초상집은 관에서 살펴준다면서.”

초상을 치른 집에서는 죽은 이를 보내는 일을 마칠 때까지 문배를 덧대곤 했다. 문에 붙이는 저런 그림은 집안의 경계를 보강해 잡것이 들지 못하게 한다고 했다. 돌아가신 분이 꼭 해를 끼쳐서가 아니라, 그 사람인 척 오는 것이 있을 수 있다고.

나는 그림 가장자리의 덜 마른 풀을 보고 손을 거두었다. 초상집인 줄은 관아에서도 알고 있었다. 그런데 장부에는 왜 살아 있는 사람으로 남겨 두었을까. 그림을 바꿀 사람은 보내면서, 이름 한 줄 고치는 일에는 아무도 손을 대지 않았다.

“해 지기 전에 닫으십시오.”

아주머니는 체를 세어 안채 처마 밑에 눕혔다.

“안다. 너도 밖에 오래 있지 말고.”

늘 듣던 말인데, 그날은 골목을 다 나올 때까지 뒤에서 따라왔다.

·   ·   ·

통금을 알리는 종이 울리자 장터가 한꺼번에 바빠졌다.

국밥집에서는 마지막 손님을 일으켰고, 짚신 장수는 팔다 남은 것들을 문 안으로 던졌다. 떡판을 메고 뛰던 사내가 순라를 보고 걸음을 늦추기에 먼저 가라고 손을 저어 주었다. 어차피 잡아 세우면 나까지 늦었다.

약속한 초소에 도착하니 임석주 형이 짚신 한 짝의 끈을 손보고 있었다. 같은 조로 밤길을 도는 형은 나보다 순라를 돈 햇수가 열 해 길었고, 낮에는 짚신을 고쳐 팔았다. 발을 옮기다 풀린 끈이 돌에 걸려 내가 잠깐 비틀거리자, 형이 고개를 들었다.

“윤겸아. 네 신부터 봐라.”

남의 발에서 벌어지는 일에는 지나치게 관심이 많은 사람이었다.

“아직 신을 만합니다.”

“네 엄지발가락은 벌써 밖에 나와 있는데?”

발가락을 오므리니 구멍이 잠깐 작아졌다. 형이 한숨을 쉬며 일감 바구니에서 손봐 둔 짚신 한 켤레를 꺼냈다.

“이거 신어. 손봐 둔 거야.”

“신값은 얼마입니까?”

“내일 국밥 한 그릇 사. 고기 든 걸로.”

나는 담에 기대 신을 갈아 신었다. 묶인 끈이 손가락 아래서 뻣뻣했다. 낮에 받은 세 닢을 생각하다가 그만두었다. 형은 내가 끈을 다 맬 때까지 가지 않고 기다렸다.

우리는 등불을 챙겨 큰길을 돌았다. 빗방울이 몇 개 떨어져 형이 전립 챙을 고쳐 눌렀다. 각자 든 등불 사이에 빛이 겹쳐, 담 밑을 달아나는 쥐도 제 몸보다 큰 그림자를 달고 갔다.

나는 이 일을 시작한 뒤로 취객을 열일곱 번 업었고 도둑에게 돌을 두 번 맞았다. 귀신을 보았다고 찾아온 사람은 셀 수 없었지만, 함께 가서 확인한 것은 대개 빨래와 고양이였다. 밤일을 하는 사람에게 잡귀 이야기쯤은 익숙했다. 그 이야기가 사실인 경우에는 어느 쪽으로 뛰어야 하는지도 배웠다.

다만 배운 길로 다리가 먼저 나가 줄지는 아직 몰랐다.

큰길 가 닫힌 가게 앞에서 아이 울음이 들렸다. 묵을 방을 찾는 여자가 자루를 안고 서 있었고, 그 뒤에 아이 둘이 붙어 있었다. 형이 등불을 높여 그들을 불렀다.

“이쪽입니다. 문 닫기 전에 같이 가시지요.”

큰길의 주막은 순라가 데려간 늦은 길손도 받아 주었다. 나는 형에게 골목 안쪽 끝집 문만 보고 오겠다고 말했다.

“여긴 내가 맡을 테니, 금방 다녀와.”

형이 길손들을 주막으로 들이는 사이, 나는 장만복 어른의 집 쪽으로 걸었다. 골목에 들어가 한 차례 꺾은 뒤, 담을 따라 스무 걸음쯤 더 가면 닿는 집이었다.

내 발이 멎은 것은 새 문배가 등불 끝에 막 걸릴 무렵이었다.

대문 앞에 누가 서 있었다. 회색 겉옷의 오른쪽 어깨가 내려앉아 있었고, 문을 두드리기 전에 허리를 한 번 폈다.

나는 그 등을 보며 장 어른이 오늘도 장사를 늦게 마쳤다고 생각했다. 입을 벌려 인사를 하려는데 사흘 전 이웃들과 상여를 들던 감촉이 먼저 떠올랐다. 어깨에 걸었던 멜빵은 땀에 젖어 있었고, 앞뒤 사람의 걸음이 어긋날 때마다 몸이 한쪽으로 쏠렸다.

내 어깨가 저절로 움츠러들었다.

똑, 똑, 똑.

세 번 두드린 뒤 기다리는 버릇까지 같았다. 대답이 없으면 조금 더 세게 두드릴 터였다. 나도 저 문밖에서 여러 번 들어 본 소리였다.

겉옷 자락 아래에는 발이 보이지 않았다.

나는 등불을 조금 내렸다. 문지방 앞에 패인 흙이 보이고, 그 위로 회색 옷자락이 떠 있었다. 바람도 없는데 아랫자락만 물속에 잠긴 것처럼 느리게 흔들렸다.

한 발 물러나자 갈아 신은 짚신이 자갈을 밟았다.

장 어른이 돌아보았다.

얼굴이 없었다.

이마에서 턱까지 젖은 종이를 당겨 붙인 듯 매끈했으며, 눈이 있어야 할 곳이 등불을 따라 움직였다. 나는 입을 다물지도 못한 채 그 자리를 보고 있었다. 등 뒤로 달아나야 한다고 생각했으나 발뒤꿈치는 벌써 담에 닿아 있었다. 나도 모르게 비켜 물러난 모양이었다.

문 안에서 발소리가 다가오다 멎었다.

“……당신이오?”

아주머니의 목소리였다.

그것의 고개가 문 쪽으로 조금 기울었다. 그것은 호랑이 그림이 붙은 문 앞에 머물렀다. 문지방을 넘지는 못했다. 나는 낮에 아주머니가 체를 세던 손을 떠올리며 겨우 입을 움직였다.

“아주머니, 겸입니다. 문 열지 마십시오.”

목소리가 작아 다시 말했다.

“아무도 나오지 마십시오!”

곧바로 가슴에 걸린 호각을 입에 물었다. 첫 숨에는 소리가 나지 않아 이로 물고 다시 불자, 가는 소리가 골목을 찢고 나갔다. 모퉁이 너머에서 형이 내 이름을 불렀다.

그 소리에 안도할 틈은 없었다. 대문 앞에 있던 것이 팔을 뻗으며 다가왔다. 호각을 놓자 목끈에 매달려 가슴을 쳤다. 나는 허리의 육모방망이를 왼손으로 뽑고, 오른손의 등불을 내밀었다.

불빛이 닿은 손가락이 잠깐 흐려졌다. 배운 것이 맞는다는 생각에 등불을 더 밀었는데, 검은 손은 빛을 비켜 등 밑 그늘로 휘어 들어왔다. 나는 오른팔을 바깥으로 빼 등불을 낮추고, 왼손의 육모방망이를 들어 내리쳤다. 여섯 모로 깎은 나무 자루가 회색 팔 한가운데를 지나갔다.

맞는 소리가 없었다. 방망이 끝이 허공을 친 듯 가볍게 빠져나가 돌바닥을 때렸다. 손이 저린 동안 검은 손바닥이 내 가슴에 닿았다.

차갑다는 생각은 뒤늦게 들었다. 먼저 숨이 빠져나갔고, 다음 숨을 들이키려니 가슴 안쪽에 딱딱한 것이 걸렸다. 등이 돌담을 긁으며 내려가 주저앉았는데도, 검은 손은 떨어지지 않았다.

등불이 손에서 떨어져 비스듬히 굴렀다. 기름 타는 냄새가 돌바닥 가까이 퍼졌으며, 통 안에서 몇 번 떨리던 불꽃이 꺼졌다. 눈앞의 회색 몸이 갑자기 커 보였다. 모퉁이 쪽에서 흔들려 오는 형의 등불이 그 윤곽을 희미하게 비췄다.

“윤겸아!”

형의 발소리가 달려왔다. 나는 방망이를 놓고 두 손으로 그 손목을 붙잡았다. 손가락이 젖은 천을 뚫듯 들어가서, 잡아당길 수도 밀어낼 수도 없었다. 그것의 손바닥만 내 가슴으로 점점 더 깊이 들어왔다.

문 안에서 빗장이 한 번 덜컥 울렸다.

“열지…….”

“안 연다! 이쪽 걱정 말고, 얼른 피해!”

아주머니 목소리에 그것의 고개가 문 쪽으로 돌아갔다. 가슴을 누르는 힘도 잠깐 느슨해졌지만 손바닥은 여전히 닿아 있었다. 나는 왼손으로 손목을 더듬다가, 손끝에 딱딱한 한 점이 걸리는 것을 느꼈다. 손바닥 바로 아래의 가는 부분이었다.

엄지와 검지를 오므리자 그 한 점만 잡혔다. 나머지는 손가락 사이로 흘러 나갔다. 나는 무엇인지도 모르는 것을 잡아당겼고, 두 손가락 끝이 타는 듯 아파 왔다. 그래도 팔을 떼어 낼 수만 있다면 놓고 싶지 않았다.

굽이 쪽 빈 창고에서 무거운 발소리가 다가왔다.

“그 손 놓게. 상대는 여기 있네.”

눈길을 든 사이 손끝의 단단한 것이 풀려 버렸다. 검은 손바닥이 다시 깊이 들어오려는데, 갓을 쓴 사내가 열린 골목 쪽에서 내 옆으로 들어왔다. 형의 등불이 그 뒤에서 흔들리며 다가왔다. 사내는 내가 아니라 회색 손목을 보고 있었다. 어깨에서 내린 굵은 나무 방망이가 그 팔 아래로 미끄러져 들어갔다.

탁!

짧게 쳐 올린 끝이 손목 옆에 맞으며 검은 손바닥을 떼어 냈다. 이번에는 분명히 소리가 났다. 나를 누르던 팔은 대문 쪽으로 꺾였고, 내 가슴과 그 손 사이에 처음으로 빈틈이 생겼다.

형이 열린 쪽에서 내 어깨와 위팔을 받쳤다. 몸이 옆으로 기울어지려 하자 손에 힘이 들어왔다. 나는 형의 팔에 기대 기침부터 했다.

“겸아, 내 쪽으로 기대. 천천히 숨 쉬어.”

숨은 여전히 반도 들어오지 못하고 도로 나갔다. 사내가 내 앞을 막아서며 회색 몸을 문 쪽으로 밀어내는 동안, 나는 형이 잡아 준 어깨를 움직이지 않으려고 애썼다.

젖은 돌 사이로 사내의 그림자가 뻗쳤다.

다리가 하나였다.

바지 한가운데서 내려온 정강이 하나가 땅을 디디고 있었다. 사내는 그 한 발을 옮겨 방망이를 비스듬히 세웠고, 회색 몸은 내 쪽으로 더 다가오지 못했다.

고맙다고 해야 할지 호각을 한 번 더 불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어쨌든 저쪽 방망이는 먹히고 있었다. 내 방망이는 안 먹혔다. 지금은 그 차이가 몹시 고마웠다.

사내가 자루를 고쳐 쥐자 옷자락이 한 번 크게 들썩였다. 그와 함께 소매 아래 오른손목에 먹줄 같은 고리가 떠올랐다. 고리가 살을 조이듯 가늘어지자 방망이를 쥔 손이 잠깐 멎었다.

사내는 조여드는 손목을 내려다보며 입꼬리를 올렸다.

“허, 벌 받는 몸은 성가셔. 큰 힘 좀 쓰면 손목부터 졸라 대니.”

그는 방망이를 짧게 고쳐 잡았다. 손목의 먹빛이 가라앉는 동안에도 회색 형체를 막은 끝은 흔들리지 않았다. 그 안쪽에서 흰 기운 같은 것이 함께 끌려 나와 가늘게 떨렸다.

“함부로 부수면 저 사람 혼까지 상해. 불, 이쪽으로 들어 주게.”

형이 왼손의 등불을 들었다. 빛이 닿은 곳에서는 회색 겉자락이 먼저 흐려져, 그 안의 희끗한 것이 잠깐 드러났다. 사내는 그 틈을 보고 방망이 끝을 손목 한 곳에 걸었다. 아까 내 손끝에 잡혔던 자리인지는 알 수 없었다.

그가 한 발을 디딘 채 손목을 짧게 틀었다. 팽팽하던 회색 몸이 자루 끝을 따라 풀려 나갔다. 나는 옷자락이 얼굴로 날아드는 줄 알고 고개를 숙였다가, 얼마 뒤 조심스럽게 다시 들었다.

회색 겉자락은 땅에 닿기도 전에 연기처럼 엷어졌다. 그것이 서 있던 자리에는 옷 한 벌도 남지 않았다. 처음 떨어뜨린 내 등불과 방망이는 내 발치에 그대로 있었다.

“겸아? 대답 좀 해라!”

문 안에서 아주머니가 불렀다.

“여기 있습니다. 문은 그대로 닫아 두십시오.”

형이 대답하는 동안 사내는 가까운 문배를 돌아보았다.

“묶인 자리를 찾아야겠군. 뿌리를 두면 또 오니.”

그는 풀칠이 덜 된 아래 귀퉁이를 손끝으로 살짝 들었다. 등과 도포 자락에 가려 무엇을 보았는지는 내 자리에서 알 수 없었다. 형이 나를 일으키려 하자 기침이 갑자기 심해졌다.

“잠깐. 지금 일으키지 말게.”

사내가 종이를 놓았다. 방망이를 다른 손으로 바꿔 짚고 돌아와 내 곁에 무릎을 꿇었다.

“눕혀 주게. 내가 숨부터 붙들겠네.”

형이 켜진 등불을 머리맡 쪽으로 옮겨 놓고 내 전립을 벗겼다. 모자를 등불 곁에 놓은 뒤에는 두 손으로 뒤통수와 등을 받쳐 평평한 땅에 내려 주었다. 얼굴 가까이 흙냄새가 올라왔다. 낮에 체를 들이다 보았던 문지방 앞의 홈이 떠올랐고, 내일 같이 관아에 가자던 약속도 그 뒤를 따라왔다.

나는 형의 소매를 붙잡았다.

“형, 아주머니…….”

“빗장 그대로야. 아주머니 목소리 들었지? 너부터 보자.”

사내가 방망이를 내려놓고 오른손을 내 가슴에 얹었다. 차가운 것이 그 손 아래로 모여드는 듯하더니, 쉴 새 없이 나오던 기침 사이에 짧은 숨 하나가 들어왔다. 나는 그 숨을 끝까지 들이마시려고 입을 벌렸다. 몸을 일으킬 힘은 돌아오지 않았다.

형은 한 손으로 내 뒤통수를 받친 채 호각을 불었다. 큰길의 순라에게 사람과 도움을 청하는 신호였다. 나를 옮기는 동안에도 이 집을 지킬 사람이 필요했다. 잠시 뒤 굽이 너머에서 같은 호각 소리가 돌아왔다.

사내는 가슴에 댄 손을 그대로 두고 빈손으로 내 왼손목을 받쳤다. 소매 밖으로 드러난 엄지와 검지 끝이 검게 변해 있었다. 그는 내 팔을 비틀지 않도록 조금만 들어 살폈다.

“아까 그 손으로 망자의 손목을 붙들었지? 누구한테 배웠나?”

“배운 적은 없습니다. 떼려다가…… 손끝에 걸렸습니다.”

사내의 눈길이 손에서 내 얼굴로 옮겨왔다.

“허, 제법이네.”

목소리에 작은 웃음이 섞였다. 그는 더 묻지 않고 내 손을 편히 내려놓은 뒤 대문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가슴에 댄 오른손은 움직이지 않았다.

“부인, 저 문배는 오늘 누가 붙였소?”

“낮에 관아에서 나왔다던 사람이 붙였어요. 초상집은 살펴준다기에…….”

아주머니의 대답이 문을 사이에 두고 들려왔다. 사내는 형을 보았다.

“그림은 내가 처리하겠네. 지금 뜯으면 안쪽도 위험해.”

“저절로 온 잡귀가 아니란 말씀입니까?”

“그 뒤에 붉은 실로 묶은 조각이 있어. 누가 죽은 이를 이 문 앞으로 끌어맨 거야.”

나는 낮에 보았던 그림을 떠올렸다. 먹빛이 선명한 호랑이와 반듯하게 찍힌 도장까지, 집을 지켜 주려고 새로 붙인 줄로만 알았다.

사내의 말이 맞는다면, 누군가 그 방비 뒤에 덫을 숨겨 둔 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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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화 끝

낯선 말